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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사실 처음 이 극을 읽었을 때 뭔가 희미하고 흩어진 연기를 맡는 것 같아서 테네시의 다른 희곡들에 비해 현실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열린 결말, 모호한 주제, 아름답지만 슬픈 환상의 동화 같은 분위기.. 하지만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해 보니 역설적이게도 그게 진짜 우리 현실이었던 것이다. 연기처럼 잡히지 않는 과거에 사로잡혀 때때로 그것이 아직 존재한다 믿으면서, 정작 현실의 중요한 것들을 망각한 채 저마다의 욕망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들. 모두가 로라의 유리 동물원 속 수집품 같다. 그런 그들의 유리를 깨트려준 짐이었지만 현실은 더 비정하고 아프다. 그런 현실이 무서워 내가 만든 나만의 동굴 속으로 더욱 깊이 도피해 버린다. 너무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그들의 도피처. 각자의 환상 속 유리를 깨어나오지 못한 채 고립되어 지내는 이들의 모습은 깊은 잠에 빠져든 꿈속을 보는 것만 같다. 로라는 우리 깊은 마음속에 숨겨 놓은 날카로운 유리조각 같은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아멘다, 톰, 짐 세 사람 모두 나약하고 여린 로라를 안타까워하지만 누구나 맘 속에 로라 한 명쯤은 품고 있지 않을까

    이 아슬아슬한 가족의 모습은 이 극이 쓰인 20년대 미국뿐 아니라 현재 우리의 가정 곳곳에도 존재하고 있다. 소통의 부재, 현실과 이상의 거리, 무력감.. 자서전에서 보듯 이 극은 테네사의 유년 시절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 예민하고 날카로운 어머니, 유약한 심성의 누이, 그리고 극을 쓰는 걸 좋아하는 테네스 자신의 모습인 톰, 그리고 자신이 직접 회고록을 작성하듯 관객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줄거리

    젊은 시절, 남편이 자신과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후로 예민하고 억척스러운 성격의 아멘다. 그리고 그녀의 현실도 과거에서 멈춰 버렸다.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와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영광스러운 지난날. 지금의 어둡고 가난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자식들이 그대로 물려받았으면 한다. 가족의 생계보다 자신의 꿈을 좇고 글을 쓰겠다며 반항하는 톰은 이기적이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집에서 유리 공예품이나 닦고 있는 소심한 로라가 안타깝다. 기술학교에 보냈지만 그마저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로라를 보며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허구한 날 꿈을 찾아 집을 나가겠다는 톰이 오래도록 로라를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누이의 남자를 데려와 달라 부탁을 한다. 그렇게 아멘다는 자신에게 그랬듯이 로라를 사랑해 줄 신사 방문객을 기다린다. 자신은 잘못된 남자를 선택으로 가정이 무너졌기에 아멘다는 가족과 생계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톰과 아멘다의 대화를 보고 있자면 많은 부모님들의 현실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나의 꿈과 여러 선택들을 언제나 존중해 주는 엄마지만 가끔 대화방식이 숨이 턱턱 막히게 할 때가 있다. 과한 걱정과 집착,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말이다. 톰의 책들을 보고 ‘쓰레기’라고 한다거나 꿈을 두고 ‘부끄러운 짓’이라고 하는 등 아멘다는 톰이 우리의 가정을 책임지는 일에 최우선을 두 길 바라고 있다. 남편의 부재가 낳은 결핍이자 집착이며,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 맞는 좋은 삶을 살길 바라는 약간의 잘못된 사랑이랄까. 그 기준에는 좋은 남자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살길 바라는 로라도 담고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생계를 걱정하는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사실 아멘다도 화려하고 잘 나갔던 자신의 모습과 잘못된 결혼이라는 과거에 붙잡혀, 현실의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유리 같은 환상 속에 묶여 있다. 정말 톰과 로라가 원하는 환상 밖의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작가 본인의 모습이 투영된 톰은 극의 흐름을 그의 시선과 회상을 바탕으로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힘들었을 유년 시절이, 그랬음에도 그가 얼마나 가족들을 사랑했는지가 잘 느껴졌다. 톰은 자신의 꿈과 가족들의 생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영화와 극을 사랑한 톰은 글을 쓰고 싶다. 공장에 일하면서도 박스에 몰래 글을 쓰곤 하고 밤마다 현실 도피하듯 영화관을 간다. 어머니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다 쓸데없고 부끄러운 짓들이라 한다. 이토록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내 꿈까지 포기하고 공장에 박혀 일만 하는데 어머니는 내게 이기적이라고 한다. 로라는 약하고 여리며 현실 부적응자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누나이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톰조차도 사실 로라와 별반 다르지 않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로라에게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 짐을 소개해 준다. 그러나 알고 보니 짐은 약혼녀가 있었다. 그 일로 로라는 상처를 받고 어머니는 자신에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화를 내더니 끝내 자신들을 바보로 만든 이기적인 놈이라고 소리를 친다. 그렇게 톰은 그 길로 집을 나간다. 톰은 그렇게 아버지의 족적을 따라간다. 톰이 집을 나가 어디로 갔는지 어떤 인생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다. 내면의 신호가 보내는 길 따라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향해 떠났지만 누이를 버렸다는 죄책감은 또 다른 환상을 마주하게 한다. 나와 타인, 꿈과 가족 그 사이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갈등했던 톰은 여지껏 나 자신의 욕망을 유리 동물원 속 환상에 가둬 넣었지만, 이제 그의 환상 속엔 유년 시절의 가족, 지난 과거만이 남아있다. 희미했던 꿈속으로 들어가 로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제 그만 촛불을 꺼요 로라’ 이뿐이다. 그 촛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묶여 있는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유리를 깨고 나온 현실이었을까.

     

    로라의 유리 동물원은 그녀가 절름발이 탓에 수줍은 성격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도 못 해보고, 자신의 걷는 소리가 창피하고, 어머니가 보내 준 기술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모든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한 채 그녀는 집 안에서 유리공예품들을 닦으며 그녀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세계에 들어가 더욱 단단한 유리성을 쌓아 올린다. 하지만 유리는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깨졌을 때 그 파급력이 쌘 법. 로라의 유리성을 열 열쇠였던 짝사랑 짐을 만났지만 짐은 그녀의 유리를 깨트리고 그녀를 영원히 그 속에 갇히게 만들었다. 자신을 현실과 분리시킨 채 살아온 ‘푸른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를 특별하게 각인시켜준다. 그것이 로라의 마음을 흔들었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로라의 과거 속 짝사랑 짐을 마주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수줍고 여리다. 짐은 그녀와 단둘 사이에 촛불을 켜고 조금씩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스스로 유리성에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로라의 단점은 로라만의 것이고 그것은 특별하고 매력적이다. 존재하지 않는 푸른 장미처럼.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어루만지고 보살피지만 짐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유리 동물 유니콘의 뿔을 깨트리고 만다. 키스를 하고 약혼자가 있다는 말을 남긴 짐은 그녀를 영원히 깨진 유리 동물원 속에 가둬 놓고 만다. 깨진 유니콘을 짐에게 줌으로써 로라에겐 더 이상 자물쇠를 열 열쇠는 없다. 그녀만의 환상 속 세상이 깨져버렸다.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처럼. 그리고 짐은 로라라는 순간의 아름다운 환상을 뒤로 한 채 현실을 살아간다. 짐은 환상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극은 톰의 시선에서 이야기할 뿐, 그 뒤로 로라의 삶은 알 수 없다. 첫사랑 짐과의 만남이 정말 그녀를 깨지 못할 꿈에 가둬 놓은 것인지 아니면 자각제가 되었을지. 미래의 톰의 바람대로 과거 속 로라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촛불을 껐다. 그녀 스스로. 짐이 봤던 로라가 정말 푸른 장미라면, 그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써 피어났을 것이다. 유리 동물원이 아닌 넓고 푸른 언덕 위에서.

     

     

    ​리뷰

    로라는 잘못이 없다. 톰도 아멘다도, 어쩌면 짐도. 우린 저마다 다른 욕망이 있고 끊임없이 그것들과 갈등하며 살아간다. 그 충돌이 낳는 괴리감은 현실의 도피처라는 유리 동물원을 만들어낸다. 박차고 나와 현실을 향해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 욕망과 현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환상에 의존하고자 하는 인물. 환상은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고 허망하다. 환상에 깊숙이 박혀 있을수록 그것이 깨지면 아프다. 하지만 그 모든 투명하고 빛나는 것들은 때때로 우리를 더 특별하고 아름답게 한다. 아프지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 한 조각을 마음에 품고 깨어날 수 있는 꿈을 꾸며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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